귀여움이 유예하는 판단
인간은 옳고 그름을 판단한 뒤 대상을 받아들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떤 대상은 판단이 끝나기도 전에 사랑스러워진다. 이미 애착을 갖게 된 대상의 문제를 따지는 일에는 그것을 잃을 수 있다는 부담이 따른다. 미는 이때 판단의 대상에 머물지 않고, 무엇을 문제 삼고 어디까지 용인할지를 결정하는 힘으로 작용한다.

장 레옹 제롬, 《배심원 앞의 프리네》, 1861. 함부르크 미술관 소장. 이미지: Wikimedia Commons, 퍼블릭 도메인.
프리네의 재판을 전하는 고대의 일화는 이러한 역전을 보여준다. 아테나이오스의 『현자들의 향연』에 따르면, 변호인 히페리데스가 프리네의 가슴을 드러내자 재판관들은 연민과 종교적 두려움에 사로잡혀 그녀를 석방했다.1 이 이야기를 미와 판단의 관계로 읽으면, 법정이 따지던 혐의 앞에 아름다운 몸이 새로운 권위를 세운 순간이 드러난다. 그녀를 처벌할 근거를 검토하던 이들이 그녀를 처벌해도 되는지를 두려워하게 된 것이다. 미는 판단의 결론에 영향을 주는 데서 나아가 판단이 이루어지는 조건을 바꾼다.
기술의 가속과 자본주의의 병폐에도 이 구도를 적용할 수 있다. 기술과 자본이 약속하는 가능성은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고통과 불안을 정당화해야 한다는 요구를 마주한다. 그러나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세계가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다가온다면, 사람들은 그 대가를 판단하기 전에 그 세계에 애착을 갖게 될 수 있다. 미가 불러일으킨 애착은 무엇을 바꾸고 거부해야 하는지 묻던 판단을, 이미 사랑하게 된 세계를 받아들일 이유를 찾는 방향으로 이끈다.
에이미 아일랜드와 마야 B. 크로닉의 『Cute Accelerationism』은 귀여움을 인간의 욕망과 정체성을 변형하는 과정으로 다룬다. 이 관점을 기술과 자본주의의 수용 문제로 확장하면, 귀여움이 변화에 대한 저항과 기존 질서에 대한 비판을 부드럽게 우회하는 경로가 보인다. 위협적인 기계의 모습으로 제시되던 미래가 돌보고 싶은 존재의 모습으로 다가올 때, 그것을 멈추려는 행위에는 잔혹하다는 감정이 달라붙을 수 있다. 여기서 귀여움은 기술의 정당성을 논증해야 할 부담을 줄인다. 기술이 허용되어야 하는지를 묻던 사람은 어느새 자신이 애착을 가진 존재를 왜 거부해야 하는지 묻게 된다.

『치이카와』 애니메이션 공식 이미지. 출처: 애니메이션 공식 사이트. ©ナガノ/ちいかわ製作委員会. 작품의 시각적 표현을 논평하기 위한 인용.
『치이카와』는 이 작동을 일상의 규모에서 읽게 한다. 작은 존재들은 노동하고 시험을 준비하며 생존을 위협하는 상대와 맞선다.2 그 조건을 인간의 현실로 옮기면 불안정한 생계와 반복되는 평가, 위험한 노동이 남는다. 그러나 둥근 몸과 짧은 울음, 서로를 위로하는 모습은 그 고통을 계속 바라볼 수 있게 만든다. 이때 귀여움이 가리는 것은 고통의 존재보다 고통스러운 세계를 거부해야 한다는 절박함이다. 관객의 관심이 그 세계의 조건에서 그 안의 존재가 무사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옮겨갈수록, 바꾸어야 할 현실은 사랑하며 지켜보는 풍경으로 남을 수 있다.
고리키가 전한 레닌의 음악에 대한 태도는 이 관계를 반대 방향에서 보여준다. 레닌은 베토벤의 「열정」을 들으면 아름다움을 만들어낸 사람들의 머리를 쓰다듬고 싶어져 음악을 자주 들을 수 없다고 말했다.3 혁명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가혹함이 미적 감동으로 흔들린다는 인식이었다. 레닌이 정치적 결단을 유지하기 위해 감동을 경계했다면, 귀여움을 통한 가속은 바로 그 감동을 변화의 동력으로 삼는다고 읽을 수 있다. 저항하는 사람이 자신의 판단을 고수하기 어렵도록, 그가 거부해야 할 대상부터 사랑스럽게 만드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기술의 가속이 초래하는 불안과 자본주의의 병폐는 남아 있다. 달라지는 것은 그 문제를 끝까지 묻고 현실에 저항하려는 의지다. 프리네의 몸이 재판관의 판단에 개입했듯, 귀여운 미래는 자신을 평가할 사람들의 감정에 먼저 자리를 잡는다. 선악을 가리는 질문은 그 대상을 잃고 싶지 않다는 마음 뒤로 밀린다. 미래는 자신의 정당성을 충분히 증명하기 전에, 이미 포기하기 어려울 만큼 사랑스러워질 수 있다.